[클릭이사람] (88) 화가로 다시 태어난 김기풍

[클릭이사람] (88) 화가로 다시 태어난 김기풍
 
천지개벽을 하면 세상이 달라지듯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 개안을 한다는 말이 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 김기풍(58). 직업군인으로 20년 이상 근무하다 화가로 변신하여 유화에 푹 빠져 지내고 있다. 그렇다고 전업작가는 아니다. 충남 아산 음봉면에 위치한 온천호텔 1층에 장원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하면서 짬짬이 그림을 그리는 겸업작가다.

겸업작가인데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다른 화가와 다른 특별한 뭔가가 있다. 다름 아닌 화실과 전시장. 그의 미니 화실과 전시장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식당안에 있다. 식당 한구석에 화실을 만들어 놓고 틈만 나면 그곳에 들어가 그림을 그린다. 전시장은 식당의 모든 내부 벽면을 활용한다. 식당을 찾는 손님들이 식사를 하면서 그림을 감상할수 있도록 작품을 전시해 놓았다. 미술계 안팎에서 그를 색깔있는 작가로 주목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을 생생하게 알고 있다. 백화점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5층에 있다가 기적처럼 살아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삼풍사고를 당한 이후 그의 인생관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인생유전을 설명하자면 얽힌 실타래 처럼 복잡하다.

원래부터 화가가 꿈이었다. 초등학교때 군대그림을 많이 그렸다. 어린 마음에 당시 전쟁중이었던 한국의 시대상황을 그림으로 보여준 셈이다. 탱크와 총으로 무장한 군인등을 그리면 반 아이들이 서로 가져가려고 쟁탈전이 벌어지던 기억이 생생하다. 중고등학교시절에는 서양 영화배우들을 즐겨 그렸다. 펜을 이용해 사실주의 그림 즉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미대를 가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대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대학생활을 하면서 군대 지휘관이 그렇게 멋져 보일수가 없었다. 지휘관의 명령 한마디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매료 되어 ROTC를 지원한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업군인이 되었다. 내성적이던 성격이 군대에서 외성적으로 변했다. 22년간 군복무끝에 고급영관장교로 89년 2월 전역했다.

제대후 취직이 안돼서 한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러다가 다시 붓을 잡았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의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다. 그때 그를 지탱해준 것은 그림이었다. 그에게 그림이 없었다면 아마 매일 술이나 마셨을 것이다.

그림으로 돌파구를 찾다가 친지의 권유를 받고 삼풍백화점 5층 식당가에서 관리를 맡게 되었다. 식당 관리를 맡은지 3년만에 세상을 떠들썩 하게 만든 삼풍사건이 터졌다. 무너진 건물더미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었다.

그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알고 5층에서 비상계단으로 뛰어내려갔다. 그러나 그도 결국 암흑천지 생지옥으로 변한 건물더미에 깔리고 말았다.

온몸을 뒤덮은 건물잔해. 생사가 뒤섞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감뿐 아무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에는 그토록 잘돌아가던 머리속이 전기가 끊어지면서 함께 정전이라도 된것 처럼…

무너져 내린 잔해속에서 필사적인 몸부림끝에 밖으로 빠져 나올수가 있었다. 인간이 극한상황에 닥치면 본능적으로 엄청난 괴력을 발휘할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죽음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이후 그는 참으로 많은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뛰어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한때 군인이 최고였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는 군인정신만으로는 통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군대가 아니라 사회이기 때문에…

군인이었을때는 군인으로서 열심히 살아가면 그걸로 족하고 군복을 벗고 사회에 나오면 자신에 맞는 새로운 길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군복을 벗는 순간 지난 과거는 깨끗이 털어버리고 군대시절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응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이때 들었다. 바로 그림이었다. 어릴때부터 좋아하던 그림을 그린다는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돌아보면 남들과는 좀 다르게 살아온 그였다. 극적인 변신의 연속이었다. 대학은 상경계열을 나왔고 직업군인이 된다. 대학원은 군에서 위탁교육으로 들어가 '컨테이너 해상운동에 대한 연구'라는 특이한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20년 넘게 직업군인으로 복무하고 나서 프로화가가 된것은 자신이 처음이라는 데에 강한 자부심을 느낀다. 그는 누구라도 상황에 따라 과거에서 벗어나 자신에 맞는 여건하에서 얼마든지 새롭게 변신할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준 셈이다.

젊음을 송두리째 군에서 보낸후 10년이 넘도록 고생을 하고 나서야 그림에 대해 나름대로 깨닫게 되었다. IMF 후유증 등으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작은 용기라도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자신이 살아온 길 그리고 자신이 그린 그림을 통해서…

그의 예술작업은 강렬한 색채와 리듬감 있는 구성으로 자연과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애쓴 노력이 엿보인다. 동양정신과 서구의 조형이 어우러진 작품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매달릴수 있는 멋진 직업이 화가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그림에서 행복감을 느낀다. 아산온천에 와서 작업실을 두고 화실겸 식당을 하고 있다. 고객들에게 보다 많은 관람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 식당내부 벽면에 약 30여점의 그림을 항상 전시해 놓고 있다. 전시한 그림은 정기적으로 교체해서 걸어 놓는다.

그동안 3번의 개인전을 열고 40여점의 작품을 팔아서 기성작가 대열에 들어섰다. 국내외 단체전은 수십차례 참가하였다. 대한민국 미술대전과 구상전을 비롯한 전국규모 공모전에서 여러번 수상을 하고 미술협회 회원이 되어 활동중이다.

"그림은 창작이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만의 색깔과 나만의 방식으로 작품세계를 만들어 가려고 노력합니다. 한마디로 미술이 재미 있습니다. 그림이 자식같고 마음에 드는 작품이 완성되었을때 더이상 부러울 것이 없을 만큼 마음은 항상 부자로 살고 있습니다"

편견을 가장 싫어하고 인간냄새가 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김작가.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작품에는 어딘지 모르게 따스한 정감이 흐르고 인간 냄새가 물씬 난다. 그림속에 의도적으로 사람을 등장시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때문이다. 절제된 인간에 대한 애정을 많이 담아낸다.

"인간은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할수 있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그림속에 모든 것을 다 보여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각자 자신의 상상력에 맞춰서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도 크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의 그림속에는 파격을 깨는 상상력이 들어있다. 파란 하늘이 아니라 노란하늘에 검은 구름도 등장한다. 빨간 시장 바구니를 든 주부의 모습도 보인다. 그는 그렇게 그림속에서 꿈을 꾼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친다.

유화작가. 나이프 작업을 주로 한다. 반추상을 즐긴다. 사진같이 그리는 그림이 아니다. 꿈이 숨겨져 있고 뭔가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그림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외형에 치우치지 않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려면 많은 명상이 필요할 것 같아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한다. 세계 유명화가들의 책을 통해 영감을 얻고 있다. 인도에도 다녀왔다. 앞으로는 깊이 있는 작품을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다. 5년뒤에는 전업작가로 나설 계획이다.

세속적이고 틀에 박힌 그림을 가장 싫어한다. 그는 그림에도 혼이 담겨 있다고 본다. 영혼이 맑고 깨끗해야 좋은 그림을 그릴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림의 매력은 미지의 세계. 얼마든지 그림속에 창작력을 발휘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자유인이라고 여긴다. 형식이나 겉치레에 얽매이지 않고 마음가는 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그런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60을 바라보는 나이답지 않게 자유분방하고 생각이 젊다. 작업을 할때는 항상 맨발로 다닌다. 그것이 가장 편하기 때문이란다. 옷입고 다니는 것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항상 개방적이고 자유스럽게 행동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보배로운 것은 무엇일까? 결코 형식주의에 빠지지 않고 다양하고 폭넓은 시각으로 꾸밈이 배제된 자유로운 표현이 아닐까?

수천년동안 우리 민족이 믿고 살아왔던 토속종교인 무속과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소외된 인간들의 모습 그리고 우리 전통문화의 진수… 이런 면에 그는 강한 애착을 느낀다.

김작가가 앞으로 어떤 그림을 그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작가의 영혼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갈 것이다. 어쩌다 한번쯤은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면서 멋진 그림도 감상할수 있는 그곳으로 주말나들이를 떠나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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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뉴스닷컴/ 김명수기자 people365@korea.com>

2000/10/18 10:4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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