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릭이사람] (76) 자신을 업그레이드시키는 여자 백미화 (2)

[클릭이사람] (76) 자신을 업그레이드시키는 여자 백미화 (2)
 
1997년 2월에 앤아버와 경계를 같이 하고 있는 입실랜티(Ypsilanti)에 있는 Eastern Michigan University의 TESOL 석사 과정에 입학 신청을 했다. 5월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baby sitter 수입은 일주일에 $100이었다. 먹는 것만 해결하는데는 적지 않은 돈이었지만 아이들이 자라니 그걸로는 생활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주말에는 또 다시 전에 일하던 식당의 웨이트리스를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 봐주고 있던 아기도 돌이 지나 걷기 시작했고 그녀를 엄마라 하면서 따랐다.

이제 가을이면 큰 아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어 집에 오후 4시에 오게 되고 작은애는Kindergarten에 입학하게 된다. 유치원 비용도 들지 않으며, 남편이 시작한지 3년만에 그녀가 공부를 시작하니 졸업시기도 거의 비슷할 것 같았다.

TESOL을 공부하고 돌아가면 일자리는 많을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응원도 싫지 않았다. 5월부터 들떠서 지냈다. 그러던 7월 어느날 친정 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많이 편찮으시니 아무래도 왔다 가는게 좋겠다는 것이다.

96년 8월에 초등학교 교장직을 정년퇴임하신후 잘 지내는 줄로만 알고 있던 아버지가 아프시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공부를 시작하면 그만둘 baby sitter도 1년 4개월만에 한 달 일찍 그만두고 고국을 향했다. 아버지는 너무 야위어 계셨다. 이미 온 몸에 암세포가 퍼진 아버지를 위해 아무 것도 할수 없다는 사실에 너무 마음이 아팠다.

울며 시작한 첫 학기. 하루하루 마음 조리며 전화통에만 매달린지 3주 만인 9월 하순에 아버지는 운명하셨다. 고생하는 딸 때문에 몇 번을 우셨다는 아버지는 그렇게 떠나셨다. 장례를 치르고 돌아와서도 계속 눈물만 나왔다. 일주일을 다녀 와보니 중간고사며 리포트 등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휴학을 할까 라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등록금을 돌려 받을 수 있는 기간이 이미 지나버렸다. 리포트는 연기해줬지만 시험은 치러야했다.

첫 학기에 그 과목을 통과해야 다음 학기를 계속할 수 있고 TESOL의 기본 이론들을 다루는 과목이라서 모든 학생들이 힘들어하는 과목이었다. 전공을 바꿔 전혀 새로운 학과에 도전한 그녀는 수업을 들어도 잘 모르는 판에 일주일을 빠지고 나니 뭐가 뭔지 더더욱 혼미했다. 시험 문제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해도 못한채 단순히 외워서 쓸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첫 번째 시험에서 철저히 무너졌다. 거의 백지로 제출한 시험지는 최하점으로 채점되어 돌아왔다.

급히 제출한 리포트들도 점수를 받지 못한 건 마찬가지. 자신이 바보 같았다. 자신감을 잃어 말 한마디도, 문장 하나도 쓸 수가 없었다.

다시 이를 악물었다. 다음 날을 위해 최소한 2시간은 자둬야 했다. 학교 공부를 따라가는 것은 토플 시험 공부하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우선 이번 학기에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두 달을 그렇게 헤매고 기말 프로젝트를 준비해야 할 때가 오자 더욱 초조해졌다. 다른 건 아무 것도 안하고 세과목에만 매달려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불안해서 먹지도 자지도 못해 심신이 위축돼갔다. 밥을 넘기지 못해 당분이 많은 과일에만 의존하다보니 체중이 많이 줄었다. 포기하겠다는 말을 꺼내자 의외로 남편은 끝까지 해보라며 용기를 많이 주었다. 고국의 가족들도 한약까지 지어 보내주며 적극 협조해줬다.

마음이 안정되어가고 입맛을 되찾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미국 친구들과 그룹 스터디도 같이 했다. paper의 목차와 서론을 쓴 다음 교수를 찾아갔다. 문제가 되면 또 다른 제목을 정해 다시 찾아가고 하기를 몇 번… 드디어 주제를 정하고 글을 써나가기 시작했다. 한 교수는 자신이 대학원 때 썼던 페이퍼를 빌려주며 읽어보라고 배려해 주었다.

현장에서 ESL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교사를 찾아가 인터뷰도 했다. A4 용지 12장이나 되는 적지 않은 내용을 논리 정연하게 풀어나갔다. 글을 써나가는 대로 친구에게 보여주고 친구의 의견도 수렴했다. 제출 날짜까지 늦지 않고 마무리지었다. 기말고사도 그런 대로 잘 치렀다. 세 과목 모두 무사히 통과되었다. 심혈을 다해 쓴 그 페이퍼 덕분에 살아 남은 것이다. 2주간의 겨울 방학 동안에는 김장도 하고 잠도 실컷 잘 수 있었다.

이듬해 1월에 시작된 겨울 학기는 교수법을 공부했다. 말하기와 듣기, 읽기와 쓰기는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 그리고 그에 따른 교재들을 연구하는 과목이었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첫학기와는 달리 너무 재미있었다. 미국 학교 교실의 수업을 보기 위해 일주일에 한나절씩 volunteer를 했다.

아버지께서 남겨주신 학비가 바닥이 났다. 누구에게도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수업은 야간에 있기 때문에 낮에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공부도 이젠 조금 자신이 생겼고 봄 학기에는 전공 두 과목만 들어도 되어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세탁물을 받아 놓거나 다 된 세탁물을 내주기만 하는 drop off 점.

여름에는 ESL 학생들을 직접 가르쳐보는 교생실습인 Practicum도 했다. 프랙티컴이 끝나고도 계속 세탁소 drop off점에서 일을 했다. 여름 방학이라서 애들을 데리고 세탁소로 가야할 때도 많았다.

그러던 중 한국통신에서 prepaid 국제 전화카드가 나왔고 미국 전역에서 판매할 사람들을 찾는다는 광고가 한국인 잡지에 실렸다. 카드를 사다가 일반인들에게 판매하는 일이었다. 앤아버의 학교 아파트에서는 국제 전화비용이 비쌌다. 고국으로 거는 전화가 1분에 $1.20 이라는 엄청난 값을 지불했었으나 한국 통신에서는 1분에 34센트. 남편은 카드 중간 공급자의 양해로 후불로 지불하기로 하고 카드 판매를 시작했다. 전단을 만들어 광고지와 함께 학교 곳곳에 붙이고 다녔다. 카드는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싶었다.

세탁소를 그만두고 카드 판매를 맡아야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갈수록 판매량은 줄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 식품점에서 판매를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장을 보러갔다가 그 자리에서 구입하는 게 얼마나 편리한가. 형편을 아는 분들은 그래도 카드를 계속 구입해주었다. 몇 분 안되지만 앤아버를 떠나올 때까지도 계속 구입해 준 그분들이 감사할 뿐이다.

full time으로 비자를 바꾸면서 졸업을 늦췄다. 선택 한과목만 들었던 마지막 학기에는 Bilingual/ESL Tutor(이중 언어 교사)로 채용되어 앤아버의 초등학교 한 곳과 중학교 두 곳에서 ESL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경향 인터넷신문에 영어 따라잡기를 연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얻었다.

미국의 수업 방식을 배우면서 느낀 건 우리가 영어 공부에 들이는 정신적 물리적 노력에 비해 소득이 적다는 것이었다. 아주 쉬운 단어로도 의사소통이 가능하지만 어떻게 어떤 단어를 사용하여 말을 하는지 몰라서 입이 안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문법 공부를 하고도 실제 글을 쓸 때는 제대로 활용을 못했다.

영어 때문에 국내외에서 많은 돈을 들이는 것이 안타까웠다.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기만 한다면 과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부모들이 감수해야 하는 부담도 줄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취지를 적어 보낸 이메일을 보고 편집장님이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남편과 그녀는 99년 12월에 졸업을 했다. 99년 여름부터 좋은 조건으로 뉴저지에 있는 미국회사에 취직이 결정된 남편은 한 학기동안 논문을 정리하고 마무리를 했다. 통신 반도체를 전공한 남편은 5년 반을 실험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집에 오는 시간은 늘 새벽 2시나 3시. 그때 바라본 앤아버의 밤하늘을 평생 잊지 못 할거라고 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오던 날도 많았다. 졸업식장에 들어설 때도, 뉴저지로 이사를 하던 날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남들은 빨리 지났다고 하지만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내야만 했던 지난 5년 반이 그녀에게는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

뉴저지로 와서 그녀에게 달라진 게 있다면 생계를 위해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저녁 6시면 남편이 어김없이 귀가한다는 것이다. 또 5년 반 동안 지하실에서 세 남자의 머리를 잘라주던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었다. 외식을 하게 되면 이제 팁도 듬뿍 줄 수 있다. 앤아버의 구두쇠, 또순이, 꾀죄죄의 여왕, 독한 여자라는 별명도 더 이상 따라다니지 않았다. 늘 잠이 부족해 피곤한 눈과 까칠하기만 했던 얼굴에도 살이 제법 올랐다.

파란만장했던 미국 생활을 이제 3개월 여 남기고 뉴저지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가을을 맞아 그녀는 다시 바빠졌다. 홈페이지를 한번 만들어 보고 싶어 web 디자인을 공부하고 있고 한국 학생들 몇 명에게 영어를 지도해주고 있다. 올 여름 고국 방문 후 귀국하기로 결정을 내린 남편도 귀국 준비에 바쁘다.

현재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 나라의 핸드폰 부품을 국산화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돌아가기로 했다. 공부한 걸 내 나라를 위해 써야한다는 생각에 그녀도 동감이다. 우리 나라 영어 교육에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바램도 사치는 아니리라. 가족 모두 공부 무사히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어 다행스럽기만 하다.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염려해주고 도와주었던 가족과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특히 헌신적 외조로 끝까지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준 남편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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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뉴스닷컴/ 김명수기자  people365@naver.com>

2000/09/20 10: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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