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시리즈］나도 할말있다 제28탄

-카투사를 아십니까?(14)-

<우리도 힘들다니까요> - “또 점프한다고?”

남자들 셋만 모이면 군대 이야기가 주를 이루곤 한다. 처음에는 불쑥 튀어 나오지만 이야기가 길어지면 반드시 자신들이 더 힘들었다고 강변하기에 이른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경험이 가장 소중하고 중요할 수밖에 없다. 약간의 허풍을 섞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다보면 어느새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남보다 더 힘들고 치열하게 군생활을 보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 대화에선 카투사나 방위 출신은 업신여김을 받기 마련. 방위와 카투사하면 우선 편하다는 편견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절대적인 시각에서는 조금은 편한 면도 없지는 않지만 카투사로 군생활을 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자신의 환경에 걸맞는 힘든 일을 겪는다.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그 경험자에겐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되는 것이다.

카투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것은 작전! 작전에 나가기 전부터 많은 힘든 일들이 카투사들을 괴롭히지만, 막상 나가고 보면 또 견딜만하다. 하지만 정말 힘든 일은 그 악명 높은 ‘점프’. 점프를 한다고 하면 모든 작전 수행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점프란 야간에 작전지를 몽땅 변경하는 것을 말한다. 작전지에서 모든 짐을 풀고 잠자리에 들 무렵 중대장의 명령에 따라 다시 그 무거운 텐트를 다시 걷고 다시 차에 싣고, 다시 이동하고, 다시 텐트를 치는 것을 말한다. 말이 점프지 그 무거운 텐트를 치려면 손가락 10개가 모두 마비가 될 정도로 힘이 든다. 미군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그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하는 우리 카투사들로서는 더욱더 힘이 부치곤 한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내 상병 때의 작전이었던 것 같다. 상병을 달았으니 이제 심리적으로는 약간의 안정을 찾을 시기였기 때문에 이번 작전은 정말 처음부터 힘이 들었다. 그래도 이번 작전만큼은 죽음의 점프가 없다니 조금은 안심이 됐다.

드디어 작전일. 꼭두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작전지에 도착하고, 거의 카투사들만의 힘으로 그 어깨가 빠질 듯이 무거운 야전텐트를 세우고, 발전기 가동하고...... 드디어 모든 상황 끝. 작전의 첫날은 대부분 이 정도로 막을 내리는데......

하지만, 이번 작전은 무시무시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피곤함에 절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을 눅눅한 침낭에서 녹이는 것도 잠시, 갑자기 밖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린다.

“WAKE UP! WAKE UP!” (일어나!)

“JUMP!” (점프한다)

정말 죽도록 듣기 싫은 소리 점프! 그 소리를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제발 이 소리가 꿈이기를... 하지만 현실이었다. 작전을 떠나기 전에 중대장의 “점프는 없다”는 호언장담은 말짱 거짓정보임이 드러났지만, 쫄따구인 우리들은 아무 소리도 못하고 밍기적거리며 투덜거리기만 한다.

다시 신발을 신고, 침낭을 걷고, 더플백을 다시 싸고, 총까지 멘 완전 군장으로 다시 텐트를 걷고...이제 다시 짐을 차에 싣고 다른 작전지로 옮긴다. 심하게 요동치는 차에 올라타고 쏟아지는 잠과 싸우며 도착한 곳은 원래 작전지와 몇 km도 떨어지지 않은 곳.

그래도 이번엔 아무도 요령을 피우지 않는다. 모두들 피곤하기 때문에 빨리 일을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만을 바라고 있다. 처음 텐트를 칠 때는 아직 해도 남아있고 날씨도 그다지 춥지 않았지만, 이젠 해도 없고 날씨도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차갑다. 그래도 텐트 치는 시간은 더 짧다.

다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반. 아침 6시경에 기상을 해야하니 투덜거릴 시간도 없다. 삼삼오오 모여 앉아 담배 한 대 피우는 게 유일한 위안거리다. 다시 몸을 눕히자마자 잠에 골아 떨어진다.

멀리서 다시 악마가 속삭인다.

“WAKE UP! WAKE UP!” (일어나!)

“JUMP!” (점프한다!)

난 내 귀를 의심한다. 설마 농담이겠지. 에이 정말 농담일거야. 하지만 이번에도 현실이다. 이번에도 진담이란다. 중대장이 다시 점프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번엔 동료들의 눈에서 빛이 났다. 아무도 소릴 내지 않는다. 드디어 흑인 병사 하나가 소릴 지른다.

“XXXX! I'm done! I ain't gonna nowhere! We're tired.”
(난 더 이상 못해! 아무데도 안가! 피곤해 죽겠다)

하지만 아무도 대꾸하지 않는다. 다시 신발을 신고, 배낭을 챙기고, 텐트를 걷고, 차에 싣고, 이동을 한다. 더욱더 기가 막힌 것은 처음의 작전지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 다시 텐트를 치고, 잠자리에 들 때 시간을 보니 새벽 5시가 다가온다.

점프를 하룻밤에 연속 2번을 한 이유는 작전을 수행하는 미군들의 태도가 중대장의 마음에 영 거슬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덕분에 우리 카투사들만 죽어라고 고생했다.

미군군대의 특징은 합리성의 극대화라는 것도 있지만, 그 이면에는 완벽한 계급체계가 존재한다. 평소에는 잘 지내다가도 실전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통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선 한국군보다는 융통성이 없는 편이다. 이런 면에서는 카투사들도 편하게만 군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약간은 치사하긴 하지만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그 중대장이 얼마나 미웠던지 한동안 우리 카투사들은 라면 파티에 중대장을 초청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김상기
 
2000/02/17 16: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