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시리즈] 나도 할말있다 제27탄

-반갑다 친구야 1-

계급장도 못붙인 논산훈련소 시절. 그냥 뭉뚱그려 훈병이라고 부른다. 군기 빠져 흐느적거리는 민간인티를 벗겨내기 위해 고된 훈련을 시킨다. 마치 이것저것 섞인 잡동산이 철광이 펄펄 끓는 용광로속에 들어가 녹고 용해되어 순도 99.9999의 철강으로 뽑아져 나온다고나 할까?
 
그렇게 눈물 콧물 흘려가며 4주간 기합을 받다보면 신기하게도 민간인티가 쑥 빠지고 진짜사나이 군인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어떻게 4주일만에 달라져도 그렇게 달라질수 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훈련이 고되고 힘들다는 것이다. 그렇게 굴르다보면 왜 그렇게 배가 고프던지. 심지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먹을 것으로 보일때도 있었다. 세상에 원참. 사회에 있을땐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어머니가 차려다 바쳐도 수저를 드는 둥 마는둥 음식 타박이 입에 붙던 나였는데…

하여튼 군대는 그랬다. 모두가 하나같이 그렇게 생활하고 그렇게 물이 들었다. 식사때가 되면 서너명이 한조가 되어 밥을 타러 간다. 소속내무반원 수십명이 먹을 음식을 타오는 것이다. 당까라고 하는 들것에 드럼통같이 커다란 짬밥통을 들고 식당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순서가 되면 밥과 음식을 타가지고 온다.
 
 그런데 음식을 타려고 줄줄이 서있는 면면들을 보면 하나같이 인간이 아니라 무슨 괴물같은 모습들이다. 한여름 땡볕아래 고된 훈련으로 온몸은 땀에 절어 꼭 소금물에 절인 짱아치 같다. 옷도 얼굴도 흙으로 범벅이 되어 귀신이 잡아먹으러 왔다가도 도망갈 꼴이다. 그러나 모두가 너무나도 태연하다. 자기 혼자 그모양 그꼴이라면 창피하고 부끄러울 테지만 모두가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그날도 나는 짬밥조가 되어 들것에 통을 싣고 식당앞으로 뛰어나가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햇볕을 조금이라도 가리기 위해 모자를 꾹 눌러쓰고 있었지만 오는 더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정말이지 너무 더워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밥타는 잠시동안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기다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순간 옆에 있는 훈병도 고개를 내쪽으로 획 돌리는 것이었다. 눈길과 눈길이 서로 마주쳤다. 둘이는 너무도 놀라 소스라칠뻔 했다. 말을 못하고 서로 ‘어 어 어 어'하며 시선을 고정시킨채 한참을 있었다.

고향친구였던 것이다. 말도 못하게 반가웠다. 구세주를 만난 느낌이었다. 따로 따로 입대를 하였는데 서로 짬밥조가 되어 식사를 타러 왔다가 기적같이 만난것이다. 둘다 모두 워낙 똥오줌 못가리는 훈병신세였기에 반가움은 몇배로 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둘이는 짧은 만남으로 정을 나눈뒤 다시 자신이 소속된 내무반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또한번 우연의 일치처럼 이뤄진 만남이 있었다. 멀리 민통선 넘어 양구까지 끌려왔다. 부대 사령부에 배치되자 마자 고된 훈련을 받았다. 더블백을 입에 물고 연병장을 돌았다. 숨이 헉헉 막혔다. 다시 선착순. 몇바퀴를 돌았는지 너무 힘이 들어 그냥 이대로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들었다.

한시간 기합끝에 단 5분도 안되는 짧은 휴식. 담배 한대 장전이라는 힘찬 구령과 함께 시작된 휴식이었다. 그때 피운 담배맛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꿀보다도 더 달콤한 그맛을 어찌 잊으리.
 
필터도 없는 화랑담배. 독하디 독하지만 무조건 맛있는데 무슨 말이 필요해. 니코틴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빨아들이기 위해 담배를 입에 물고 숨을 깊이 들이마신다. 그리고는 천천히 연기를 내뿜는다. 동그랑땡을 그리면서.
 
그런데 또 기적이 일어났다. 그 짧은 5분휴식시간. 담배 한대 장전하는 시간에 친구를 만난 것이다. 땅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다리를 쭉 내뻗은채 고개도 안돌리고 옆사람과 농담따먹기를 주고 받았다. 물론 담배를 연신 피워대면서.

그런데 말소리가 웬지 낯이 익었다. 둘이는 동시에 서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고향 친구였다.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것이다. 얼싸안고 엉엉 울었다. 다리 관절염으로 군대가면 큰일이라면서 먼저 입대하는 나를 보고 땅이 꺼지도록 걱정을 하던 친구였다. 그친구만은 만성관절염때문에 군에 못올줄 알았는데 신이 심술을 부렸는지 불운하게도 군에 끌려온것이다. 나보다 한달쯤 늦게 입대를 했으니 군대에서는 나보다 졸병인 셈이다.

그러나 둘의 만남도 잠시 뿐이었다. 나는 포병. 그는 보병으로 서로 갈길이 달랐다. 둘이는 이별의 악수를 나누면서 군대생활 열심히 해서 꼭 건강하게 제대하여 다시 만나자고 다짐을 하였다. 자그마치 22년 전이다.
 
나중에 제대하여 그친구를 다시 만나보고 또한번 놀랐다. 평생 따라다닐것 같은 관절염이 씻은듯이 나았다는 것이다. 전방 육군 보병부대에서 3년을 뛰고 달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완치되었다는 것이다. 그친구에게는 괴로운 군대생활이 오히려 고질병을 고쳐준 기회를 만들어준 셈이다.

다음에 이야기 계속됩니다.
 
김명수
 
2000/02/16 1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