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시리즈] 나도 할말있다 제22탄

-에피소드-

자대에 끌려가서 며칠되지 않았을 때 고참이 불렀다. 무조건 애인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기한은 한달. 그동안 만들어 내지 못하면 그 때는 각오하라며 은근히 협박을 하였다. 천지분간 못하는 새파란 졸병인 나는 하늘같은 고참의 말에 무조건 대답부터 했다. 결과야 어찌되던 말던 우선 눈앞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고참으로부터 엄명을 받고 혼자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궁지에 몰리면 통한다고 했다. 순간 번쩍하고 내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디어. 편지를 쓰자. 내가 탈영하지 않는 이상 여자를 만들어 내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다.
 
하루가 지났다. 누구를 대상으로 할까? 이리 저리 머리를 굴리다가 선착순으로 했다. 아무나 먼저받는 사람이 읽고 답장을 해달라는 뜻에서 선착순으로 했던 것이다. 학교는 모 대학. 바로 나에게 애인을 만들어내라고 지시한 고참이 다니던 학교였다. 온 정성을 다하고 갖은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서 편지를 썼다. 그리고 부쳤다. 수신인은 선착순. 발신인은 물론 고참이름으로…

그리고 마음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좀 답장을 보내달라고… 고참은 틈날 때마다 나에게 어떻게 되었는지 물어보곤 하였다. 나는 그 때마다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결과가 올것이라고 대답을 했다. 그렇지만 일주일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속으로 똥줄이 탔다. 다시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고참은 이제 답장을 포기한 눈치였다.

나는 속으로 긴장이 되어서 잠도 오지 않았다. 남은 군대생활이 괴로울줄 알라면서 고참은 차가운 시선으로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고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거의 한달이 다 되어갈때 편지가 왔다. 발신인을 보니 선착순이 아닌 다른 이름이 적혀있었다. 편지를 받아든 고참은 좋아서 입이 벌어졌다. 편지의 내용을 보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졸업반 여학생이었다. 교직을 이수한 예비교사였던 것이다. 이름이 아름다운 그 여학생이 나를 살려준 것이다. 답장을 하게된 사연은 이렇다. 학교 편지 사서함에 편지가 있었다. 처음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도 그 편지 한통만은 그대로 사서함에 꽂혀 있었다.

누구 편지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편지를 꺼내 보았다. 발신인을 보니 그 이름도 희한한 선착순이었다. 별이름도 다 있다며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 편지는 여전히 편지통에 남아있었다. 내용이 궁금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나중에는 무슨 내용인가 읽어만 보려고 편지를 슬쩍 가져왔다. 내용을 읽어보고 자신이 바로 주인공이라는 것을 알고 기가 막혔다.

그때부터 편지를 쓴 군인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답장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웬걸. 시간이 지나면서 답장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답장을 했다는 것이다. 답장은 대충 그런 내용이었다.

한통의 답장을 받은 뒤로 고참은 나에게 약속대로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로 시도 때도 없이 고참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주는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부대 내에 소문이 퍼졌다. 편지를 잘쓴다고 내 이름이 팔린 것이다. 다른 고참이 또 나에게 부탁을 해왔다. 말이 부탁이지 명령이었다. 제대가 한달도 안남은 왕고참이었다. 나는 거절을 할수가 없었다. 거절을 하면 그순간 부터 고참한테 시달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미안하지만 나의 사촌 여동생을 제물로 삼았다. 사촌 여동생한테 오빠의 군대생활이 괴로워 미치겠으니 네가 나를 살리는 셈치고 고참에게 편지를 보내달라는 하소연을 했다.

편지를 보낸지 며칠만에 반응이 왔다. 여동생으로 부터 답장이 온것이다. 답장을 받아든 고참은 기뻐서 어린아이처럼 환호를 질러댔다. 그때부터 고참은 나를 친동생처럼 대해주었다. 고참은 얼마 안되어 제대를 하였다. 나중에 여동생을 만났다.

여동생은 오빠인 내가 고생할 것같아서 아무 생각 없이 편지를 보냈다고 하면서 무안한 듯 피식 웃었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 있었던 일은 그 고참이 제대를 한후에 여동생을 만나러 집에까지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말을 듣고 왜 그렇게 웃음이 터져 나오던지…

고된 훈련과 기합속에서도 크고작은 에피소드가 끊임없이 벌어졌다. 사회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군대라는 갇힌 울타리안에서는 모든것이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그만큼 보고 듣고 느낄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하사 한 명. 군대에 오기전에 애인이 있었다. 유난히 애인을 그리워 했다. 하기사 사회에서 호의호식하며 애인과 붙어 지내던 그시절이 눈물나도록 그리울 만도 할것이다.

그런데 사고가 났다. 그 하사가 휴가를 가서 귀대를 하지 않은 것이다. 애인을 만나 일주일을 같이 지내다 보니 부대오기가 싫었던 모양이다. 부대에서 비상이 걸리고 난리 부루스가 터진 것은 당연지사였다.

나와 절친했던 통신병. 밤마다 울었다.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목놓아 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아팠다. 사연을 들어보니 그럴만도 하였다. 군대에 오기 전에 이미 결혼을 하여 사랑하는 마누라와 토끼같은 어린 딸이 있었던 것이다. 두고 온 처자식이 보고 싶다면서 이름을 불러대며 하염없이 흐느껴 울던 그 전우는 나보다 나이가 두살이나 많았다. 둘이는 서로 부둥켜 안고 위로하면서 졸병시절의 우정을 키워나갔다.

멋없고 무뚝뚝한 경상도 말씨를 쓰는 전우. 지금도 그시절이 머리속에 선하게 떠오른다. 지겹게도 시간이 안가던 군대생활. 제발 제대만 하면 소원이 없겠다던 힘든 시절. 세월이 흘러 어느덧 나도 고참이 되었다. 그리고 제대를 하였다. 제대하여 집에서 쉬고 있는데 누가 찾아왔다. 눈이 무릎까지 빠져 천지분간 못하던 깜깜한 밤이었다. 눈보라와 거센 바람에 사람소리인지 바람소리인지 밖에는 씽씽 소리가 계속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가 부르는 것 같았다. 대문을 열어보니 그때 그렇게 목놓아 울었던 통신병이 서있었다. 뜻밖에 찾아온 군대친구를 보고 너무 놀랐다. 귀신이 나를 잡으러 온 것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둘이는 너무 반갑고 기뻐서 눈오는 마당에서 서로 껴앉고 한참을 굴렀다. 멀리 부산에서 충청도 칠갑산자락의 오지중의 오지를 물어물어 찾아온 것이다. 찻길에서 무려 7키로나 떨어진 좁은 길을 눈보라를 뚫고 찾아온 친구가 미치도록 고마웠다. 둘이는 술을 마시면서 신이 나서 밤이 새도록 군대시절 이야기를 하였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할까. 벌써 20년이 넘은 까마득한 과거일이니 그토록 보고 싶다던 그 어린 딸아이 는 장성하여 시집을 가고도 남았을 것이다. 지나고 보니 그시절이 왜 그렇게 떠오르는 지 모르겠다.

다음에 이야기 계속됩니다.
 
김명수
 
2000/02/09 16:04